이전 회사에서의 단상
"오전, 오후, 저녁, 밤, 새벽..."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쌓인 수백통의 메일을 읽고 응대하며 오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메일을 하나라도 놓치는 날에는 발신자에게 전화가 오거나 '메일 확인 왜 안하셨어요?'라는 기분더 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오후에는 화려한 미팅스케줄이 장식한다. 여기저기 영문도 모른체 끌려가서 내 잘못도 아닌데 혼나고, 내 일도 아닌데 업무 assign되어 온다. 외부회의라도 있는 날에는 이동으로 소비되는 시간도 무척이나 많다.
그러고 나서 어느덧 저녁~ 출근시간은 있지만 퇴근
여기저기 전화 통화소리에 회의실에서 흘러나오는 고함소리에, 매일 늦은 퇴근 때문에 가족들에게 쩔쩔매는 통화소리에. 오히려 다른거 없이 집중만하고 코딩할 수 있는 그 저녁시간은 무척이나 짧게 느껴진다. 이슈 몇개 처리하고 해외법인에 이메일 보내고 형상관리 시스템에 commit 하고, 유관부서 협의내용 정리하고, 며칠 동안 끙끙앓던 버그 잡고, 신입/후배사원들이 질문해 오면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고 이슈도 같이 해결해 주고, 물한잔 마시고 숨 한번 돌리면 벌써 밤 11시다.
이슈 해결하기 전까지 집에 가지 말라는 PL의 불호령에, 해외 법인과의 Conference가 해외법인 출근시간에 맞춰 새벽에 있는 날이면 퇴근이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업무적으로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짠 코드가 아니더라도 중간관리자면 이슈하나하나가 모두 내 잘못이고 내 실수인것이다. 그래서 내 커버리지가 아니더라도 코드 열심히 분석해서 수정하고 patch 만들어서 뿌리고.
매일 빌드돌려 발행하는 그 버전이 울트라캡숑초특급라스트마지막 버전이라는 PL들의 협박과 뻥을 들으며, 혹은 내가 그렇게 협박과 뻥을 쳐가며... 절대 이 패치는 Side Effect가 있어선 안된다며 속으로 기도하듯이 그렇게 Commit을 하지만, 수정사항과는 상관도 없는 미검출 버그를 Side Effect라 우기는 테스터 담당과 전화 통화로 크게 한바탕 싸우고. 개발자들의 생사여탈권과도 같은 이슈 close 권한이 있는 테스터들에게 더 대들었다간 다음 번 이벤트에는 또 다른 칼부림이 날지 몰라, 살살살살 달래가며, 속으로는 울면서 코드 수정하고 패치를 만들었다.
항상 USP개발을 많이 하다보니 PL이나 Q부서로부터의 주 타겟이 되어온 나로서는, 내 덕분에 버전을 다시 내게돼서 자신들 수정코드도 반영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도 수도 없이 많았고, 피크를 찍던 주임연구원 시절에는 연구소에서 이슈가 가장 많은 랭킹 1위를 몇달간 찍기도 했고, 연구소에서 말 제일 안듣는 놈이라는 연구위원님의 탄식에 그럼 난 배쨀테니 내일부턴 이슈정리 직접하시란 말에, 그래도 너 아니면 다 죽는다는 말로 살살 달래주기도...
남몰래 인센티브 꽂아주던 그룹장 파트장님들에겐 감사하지만, 더 이상 큰 회사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내가 관심있어하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고, 5년 후 10년 후 나의 모습이 그 때의 파트장, 그룹장님들이었기에.. 그렇게 조직에 매여 살면 나중에 조직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는 내가 할 일이 없어질 거란 슬픈 현실을 느끼게 되었다.
큰 조직이라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었겠지만, 계속해서 설계, 개발하며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순간 더이상 나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렇게 전쟁치르듯이 회사를 다녔고 전쟁같은 사랑을 줘가며 다니긴 했지만, 어느 순간 "어? 이 일은 다 망하는 일인데?" 라는 프로젝트들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잖나 식으로 프로젝트를 밀어부치고, 결국 그렇게 몇 달의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프로젝트가 드랍된 걸 보니 정말 허무했었다. 실패도 경험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위로도 위로라고... 눈에 뻔히 잘 안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에 같이 몸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부정하지도 못하고, 조직의 논리로 그 아까운 시간 허비해 가며 쏟은 노력이 너무 안타까웠다.
"새로운 회사, 개발자로서의 자부심"
그러는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github에는 어느덧 Javascript의 코드가 반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개발 경력 11년동안 듣도보도 못한 엄청난 기술들이 인터넷에 널리고 널렸다. 개발자들은 본인이 스스로 짠 코드의 비율이 20%도 안되고, 이젠 오픈소스가 그 남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보물과 같은 오픈소스를 활용하여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보게 되었다. 특히 apache foundation산하의 project들이나 node.js 같은 것들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인다. 게다가 질 좋은 코드를 볼 수 있는 github에는 하루에도 셀수 없는 코드들이 커밋된다. 공부하다보면 하루가 다 간다.
새로운 회사로 옮긴지 아직 3개월도 안되었지만, 정말 많은 공부를 하며 그동안 늦춰져있던 기술들을 열심히 익히고 있다. Evernote에 정리해가며 공부한 노트가 어느덧100개가 넘어버렸다. 아울러 이전에 학부시절 배웠던-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알고리즘들도, 오랜 세월 개발을 해 보니 이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하루에 알고리즘 혹은 google codejam 문제를 2~3개씩 풀며 내공도 쌓아가고 있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방향을 잡고 잘 걷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회가 많이 든다. 왜 진작 그만 두지 않았을까. 한참 개발자로서 자부심이 강할 때는 다른 좋은 회사에서 은밀히 들어오는 이직 제의도 거절했었다. 나름 대로 애사심이란 것이 있어서 비록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난 이곳에서 잘 성장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년지나고 몇몇 멍청한 윗사람들의 엄청난 의사결정으로 회사가 망가져 가게 되었는데 나는 그 난파선 같은 조직에서 쉽사리 나오지 못했다.
이젠 다시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예전의 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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